표현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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옛 한글 무덤

옛 한글들이 죽었다. 소리가 변하고, 구별이 무의미해지고, 쓰임이 없어지면서. 이 곳은 죽은 글자들의 무덤이다.

ㆆ여린히읗1460년대 소멸

성문파열음 [ʔ]. 훈민정음 28자 중 하나였지만, 고유어에서는 독립 음소가 아니었다. 한자음 표기 용도로만 쓰이다가 세조 이후 사라졌다.

ㅹ · ㅱ한자음 전용 순경음~1480년 소멸

ㅹ(순경음 쌍비읍)과 ㅱ(순경음 미음). 중국 한자음의 [f]와 微모를 표기하기 위해 동국정운(1448)에서만 사용되었다. 고유어에는 대응 음소가 없어, 동국정운식 표기 체계 폐기와 함께 소멸.

ㅸ · ㆄ고유어 순경음15세기 중반 소멸

ㅸ(순경음 비읍)과 ㆄ(순경음 피읖). ㅂ·ㅍ 아래 ㅇ을 붙여 양순마찰음 [β]를 표기했다. [β]→[w]로 약화되어 모음에 흡수. ㅂ불규칙 활용(덥다→더워)이 그 흔적.

ㅥ · ㆅ · ㆀ사라진 각자병서15세기 소멸

ㅥ(ㄴㄴ)·ㆅ(ㅎㅎ)·ㆀ(ㆁㆁ). 같은 글자를 겹쳐 된소리를 표기했다. 현대에 살아남은 ㄲ·ㄸ·ㅃ·ㅆ·ㅉ과 달리, 이 셋은 음소 대립 자체가 사라지며 소멸.

ㅿ반시옷16세기 말 소멸

유성 치경마찰음 [z]. 모음 사이에서만 나타났고, 점차 약화되어 탈락하거나 ㅈ에 합류했다. ㅅ불규칙 동사(짓다→지어)가 그 흔적.

ㅦㅧㅨ ㅮㅯㅰ ㆂㆃ사라진 종성 겹받침15~17세기 소멸

ㄴ계: ㅦ(ㄴㄷ)·ㅧ(ㄴㅅ)·ㅨ(ㄴㅿ). ㅁ계: ㅮ(ㅁㅂ)·ㅯ(ㅁㅅ)·ㅰ(ㅁㅿ). ㆁ계: ㆂ(ㆁㅅ)·ㆃ(ㆁㅿ). 중세 국어의 복잡한 종성 자음군이 단순화되면서 소멸. ㅿ·ㆁ을 포함한 것들은 해당 글자의 소멸과 연동.

ㅩㅪㅫㅬㅭ사라진 종성 겹받침 — ㄹ계15~17세기 소멸

ㅩ(ㄹㄱㅅ)·ㅪ(ㄹㄷ)·ㅫ(ㄹㅂㅅ)·ㅬ(ㄹㅿ)·ㅭ(ㄹㆆ). 현대에 살아남은 ㄹ계 겹받침(ㄺ·ㄻ·ㄼ 등)과 달리, 이 다섯은 자음군 단순화와 ㅿ·ㆆ 소멸로 사라졌다.

ㅲㅳㅶㅷ ㅴㅵㅂ계 · ㅄ계 합용병서17세기 초 소멸

ㅂ계: ㅲ(ㅂㄱ)·ㅳ(ㅂㄷ)·ㅶ(ㅂㅈ)·ㅷ(ㅂㅌ). ㅄ계: ㅴ(ㅂㅅㄱ)·ㅵ(ㅂㅅㄷ). 어두에서 둘 이상의 자음이 연속되는 자음군을 표기했다. 서울말 기준 17세기 초에는 이미 소멸. 된소리 또는 유기음으로 합류.

ㅺㅻㅼㅽㅾㅅ계 합용병서17세기 초 소멸

ㅺ(ㅅㄱ)·ㅻ(ㅅㄴ)·ㅼ(ㅅㄷ)·ㅽ(ㅅㅂ)·ㅾ(ㅅㅈ). 어두 된소리를 표기하는 데 사용되었다.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 각자병서(ㄲㄸㅃㅆㅉ)로 된소리 표기가 통일되며 완전 폐지.

ㆁ옛이응17세기 소멸

연구개 비음 [ŋ]. 영어 sing의 ng 소리. 초성에서 [ŋ]은 실현되지 않아 ㅇ과 구별이 무의미해졌고, ㅇ이 초성(무음)과 종성([ŋ]) 이중 역할을 흡수했다.

ㆍ아래아16~18세기 소멸

후설 모음 [ʌ]. 훈민정음에서 '하늘(天)'을 상징한 기본 모음. 비어두 음절에서 ㅡ로, 어두 음절에서 ㅏ로 합류하며 소멸. 오직 제주 방언에만 잔존.

ㆎ · ㆉ · ㆌ아래아 복합 모음18세기경 소멸

ㆎ(ㆍ+ㅣ → 현대 ㅐ에 합류)·ㆉ(ㅛ+ㅣ)·ㆌ(ㅠ+ㅣ). 아래아(ㆍ)가 소멸하면서 이를 포함한 복합 모음 체계도 함께 사라졌다.

ㆇ · ㆈ · ㆊ · ㆋ해례본 이론적 모음실용 기록 없음

ㆇ(ㅛ+ㅑ)·ㆈ(ㆇ+ㅣ)·ㆊ(ㅠ+ㅕ)·ㆋ(ㆊ+ㅣ). 훈민정음 해례본 중성해에서 '같은 부류의 모음끼리 합할 수 있다'는 원리를 증명하기 위해 기재되었으나, 실제 문헌이나 발화에서 쓰인 적이 없는 이론적 글자.

죽은 글자들의 무덤 앞에서

그렇게 옛 글자들은 사라졌다. 소리가 조금씩 변하고, 점차 아무도 그 소리를 발음하지 않게 되었을 때, 글자는 조용히 그 쓸모를 잃었다.

이것은 모든 언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. 한글도 예외는 아니다. 실질적인 아쉬움이 있다면 외래어 표기의 빈자리이다. ㅸ이 살아 있었다면 video의 [v]를, ㅹ이 살아 있었다면 coffee의 [f]를, ㅿ가 살아 있었다면 zero의 [z]를 지금보다 정확히 적을 수 있었을 것이다.

죽은 글자들의 무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. 딱히 없다. 아이우에오 입을 풀고, 한때 살아있었던 글자들의 음운을 가능한 한 발음해보는 것?

우우-하고 입을 풀고 있을 때, 봉분 위로 휘이- 한 가락 바람이 스쳤다.
글자로 된 유령들이 ㆌㆌ- 죽은 소리를 내고 있다.

참고:한국민족문화대백과 — 훈민정음 28자모한국민족문화대백과 — 순경음한국민족문화대백과 — 동국정운한국민족문화대백과 — 병서한국민족문화대백과 — 어두자음군한국민족문화대백과 — 중성해최윤갑, 「모음자 ㆉ·ㆌ·ㆇ·ㆊ·ㆋ와 그 음가에 대하여」(중국조선어문, 1992)이기문, 「국어사개설」(태학사, 1998)Lee & Ramsey, A History of the Korean Language (Cambridge, 2011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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